최근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맡게된 프로젝트가 있다. 회사의 Data Warehouse(이하 DW)를 재구축하는 프로젝트인데, 반년정도 미리 시작한 운영계 시스템에 대한 후속프로젝트다. 운영계를 구성하는 프로젝트는 예산 규모가 몇백억을 훌쩍 넘어가고 30명 정도의 전담팀이 구성된 그야말로 대규모 프로젝트다. 다만, 운영계 프로젝트 사전 분석에서는 어떤 기능들이 추가되고, 데이터 구조가 어떻게 변경될 수 미리 파악할 수 없기에 DW 재구축은 어느정도 운영계 시스템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진 이후에 다시 프로젝트를 띄우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운영계 프로젝트로 인력도 리소스도 부족한 해당팀에서 후속 프로젝트를 진행하는것이 무리이기도 하고 데이터 분석 등 관련업무를 하는 우리팀에 자연스레 협조 요청이 왔고 팀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시작하게된 DW 재구축 프로젝트였고 현업에서는 팀 실무자 고참인 필자가 자연스럽게 PM을 맡게 되었다.
다만 몇가지 제한 사항이 있었는데,
첫번째로는 기존 시니어 개발자의 줄퇴사로 남아있는 DW 개발자는 1~2년차 주니어급들만 남은 상황이었다. 1~2년차임에도 족히 대리급의 업무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담당자들이지만, 현업 업무도 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기존 히스토리나 새로운 이슈에 대응하기엔 아직은 경험이 조금 부족했다.
두번째로는 기존 운영계 프로젝트팀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점이었다. 운영계 프로젝트 담당자들도 운영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초반 DW 착수를 위한 요구사항 도출에 어느정도 발을 걸쳐있다보니 제한적인 리소스 내에서도 잘 해주었지만 운영계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슈들과 DW에 추가로 반영해줘야하는 요구사항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뭔가 우리가 해줘야하는 업무가 명확하지 않은채 요구사항이 추가되다가도, 없어지기도했다.
세번째로는 현업 담당자인 필자의 역량 부족이었다. 물론 기획자로 근무하며 다양한 시스템의 프로젝트를 진행해봤지만 DW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그래서 인프라부터, 서비스 구조도, 데이터 모델링, ETL 등 다양한 부분을 공부하며 따라가봤지만 이제서야 회의에서 용어들을 어느정도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뭐를 어떻게 기획해야되고 요구사항을 도출해야되는지 막막했다. 사실 현업의 요구사항이라면 BI툴의 편의성 개선정도이지, DW안에 어떻게 데이터 마트가 구성되어있고 모델링이 어떻게 이루어져있는지는 알 바는 아니였다.
그러다 이슈가 터졌다.
한창 범위를 산정하고 이미 그룹 본사에 '이 프로젝트때문에 얼마 쓰겠습니다~' IT투자에 대한 검토까지 받아놓은 상황에서 새로운 요구사항이 추가된 것이다. 운영계를 개발하는 조직에서 현재 운영계 시스템의 일부분을 DW 프로젝트에서 개발을 해야된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특정 화면의 데이터는 DW에서 가져가는데, 그렇기 때문에 DW 프로젝트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운영계 시스템은 만질 생각조차 안했던 현업 PM인 필자나, 개발 PM 담당자도 당황스러웠는데, 기존 운영계 프로젝트에서는 그 부분이 범위에 포함이 안되어 있어 아무튼 누군가 해야한다면 그건 우리였다.
지금 예산도 경영진들의 의사결정을 받기 쉽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게다가 이미 본사의 투자금액 검토까지 끝난 상황에서 새로운 요구사항이 갑자기 불거지는건 PM으로써 달가운 상황은 아니였기때문에 조금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운영계쪽 PM은 다소 당황하며 재차 요청해봤지만 내 프로젝트가 (혹은 내 개발자들) 중요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받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운영계 PM : ERP에서 50개 화면정도가 허공에 뜨는 상황입니다. 오너십이 기존에도 DW쪽에 있었으니 개발 요청드려요.
필자 : 그럼 저희 프로젝트에 ERP를 구성하는 개발자도 필요합니다. 이미 투자 예산 검토가 끝나서 쉽지 않을것 같아요. 저희는 화면에서 콜하시는 데이터만 드리는 방식으로 개발하는건 어떠세요?
운영계 PM은 당혹한 얼굴로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고, 다시 팀장님들과 미팅을 하자며 바로 다음날 오전 회의가 잡혔다. 팀장님께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고 모두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다시 같은 양상으로 돌아갔다. 넘기려는 운영계 팀과 왜 받아야되고, 받으면 얼마나 더 추가 소요가 발생하는지 알 수없어서 당황스러운 DW 구축팀. 그러던 차에, 내가 경솔한 말을 뱉었다.
필자 : 아니, 처음에는 DW리소스만 쓴다고 했다가 갑자기 ERP 화면 개발까지 넘기시면 저희도 예산이 확정된 상황에서 곤란합니다.
운영계 PM을 겨냥한건 아니었지만, 말하고나니 그를 겨냥한게 되어버렸다. 팀장님들까지 참석한 상황에서 '내가 놓치지 않았고 나도 당황스러운 피해자다' 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건지는 모르겟다. 사실을 말했지만 그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던 말이었다. 왜 말했을까. 이어서 운영계 개발 팀장님이 답변하셨다.
운영계 개발 팀장 : 잘잘못을 따지자는 거는 아니고.
그렇게 설왕설래 도중, 우리팀 팀장님이 입을 떼었다.
현업팀장 : 지금 기존 프로젝트와 DW프로젝트는 별도의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연속되는 프로젝트고 결국은 회사에서 누군가는 해야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곳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해야될까요? IT팀장님, 저희 예산이 넘으면 다시 검토를 받아야 할까요? 운영계 개발 팀장님, 지금 프로젝트에선 확실히 범위가 아닌거죠? 회사 차원에서 중복 투자가 될까봐 그렇습니다.
그렇게 팀장님은 지금 할 수 있는말이 아닌 해야할 말씀을 하셨다. 상황을 정리하고 일이 되게하기위해선 여기 있는 사람들이 각자 무엇을 하면 좋은지에 대해 얘기했다. 동시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내몸하나 건사해보겠다고, 선그으며 곤란하다고 하며 잘잘못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했던것 같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나랑 같이 일하는 개발자들 대변한다는 것이었다.
큰 이슈와 수 많은 담당자들의 참석에도 회의는 30분 남짓 후 종료되었다. IT실에서 본사로 이동하는 발걸음 내내 내가 했던 발언을 후회했다. 그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나하나 똑똑해보이자고 했던 그 말. 누구도 못해서 못하는 말이아니라 안하는 말. 그런말들을 내뱉은 내가 PM으로써 자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수 없이도 많이 마주하는 상황인데,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았다느니, 써놨는데 니가 못봤다느니 잘잘못을 가리려면 끝도 없다. 그렇게 가려진 정의(?)뒤엔 씁씁한 승자와 만신창이 패자만이 남은채 프로젝트의 사기는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린다. 그리곤 '다신 만나지 말자' 라고 결심하며 헤어지곤 한다.
아주 간단한 진리지만, 결국 PM의 자질은 '프로젝트가 되게 하는 것' 이다. 아무리 망가진 상황에서도 어떻게하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챙기며 심리적 안전망을 만들어 주는것. 그게 PM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내일은 내가 의도치 않게 공격한 운영계 PM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수줍게 사과해야겠다. 내가 경솔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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